The Race Day!!!

지난 일요일 샴버그의 한 공원에서 열린 Rainbow Sunset 10K 달리기 대회에 참가했다. 샴버그는 오헤어 공항 근처에 있는 시카고의 위성 도시인데 근처의 호텔들이 시설이 훌륭한 데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주변 경관이 좋아서 우리 가족이 가끔 시카고에 놀러 올 때면 하루 밤 묵어가는 곳이다. 지난 봄에 참가했던 일리노이 마라톤 대회의 기억이 좋아, 여름을 맞이해서 참가할 만한 대회가 없을 까 찾아보던 중에 샴버그에서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보고 시카고에 놀러도 갈 겸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무작정 등록을 한 것이다. 


하루전인 토요일에 올라와 호텔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오전엔 호텔 수영장에서 요즘 한창 수영에 빠져있는 큰애와 한참 수영을 한 후에 H마트에 들러 점심도 먹고 쇼핑을 한 후 경기장소인 Busse Woods Forest Preserve 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쯤. 경기 시작 시간인 오후 4시까지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기록 측정을 위한 칩이 내장된 번호표를 받고 공원에서 아이들과 한참을 놀다 보니 드디어 경기 시작 시간이 다 되었다. 아직 여름의 태양이 한창이어서 기온은 90도 (섭씨 32도)를 넘는, 달리기에는 약간은 더운 날씨었지만 바람은 적당히 불어서 공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상쾌한 기분이 드는 그런 날씨였다.

3시 50분 쯤 출발선으로 가 자리를 잡았는데, 수천명이 모였던 일리노이 마라톤과는 달리 약 100여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 시간인 4시보다 조금 이른 3:55분에 아내와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드디어 출발을 했다. 초반 레이스의 느낌은 매우 좋았다. 시내의 차길을 달렸던 일리노이 마라톤에 비해, 나무가 우거진 공원의 잘 정비된 산책로를 달리는 기분은 좀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페이스도 목표했던 마일당 8분 30초 대를 유지하면서 잘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반환점인 3마일을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넘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고 발바닥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4마일을 지날 무렵부터는 페이스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몸의 고통이 점점 심해져 갔다. 5마일을 지날 무렵부터 결승점을 통과할 때 까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더위를 먹어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결승점을 통과할 때 나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고 한다.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 30분쯤 지나서였다. 그 사이 아내가 가져다 주는 생수와 이온 음료를 정신없이 먹고, 몸에 물을 뿌렸다.

집에 돌아와서 휴대폰에 RunKeeper 프로그램에 남겨진 기록을 보니 내가 얼마나 막판에 무너졌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래 그림의 페이스를 보면 5.69마일까지 49분이 결려서 마일당 약 8분 36초대로 거의 목표했던 속도로 달렸지만 그 이후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져서 마지막 0.3마일은 거의 걸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마지막 0.5마일에 9분이나 결려서 최종 결과는 58분. 마지막 0.5마일만 참고 제대로 달렸으면 목표했던 대로 53분대를 끊을 수 있었을 텐대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병원에 실려가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운 것이 있다면 더운 여름날에는 달리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대회 참석은 멀리해야 할 듯 싶다.


결승점을 통과한 이후 프로그램을 정지시키는 것을 잊어서 30분 가량이 더 기록되어 있다.

 

mi 

Pace (min/mi)

Elevation (ft)

1

8:24

-9

2

8:18

-19

3

8:28

12

4

8:41

-21

5

8:55

-1

6

10:00

38

7

82:17

16

광고

The 1 Percent’s Problem


http://www.vanityfair.com/politics/2012/05/joseph-stiglitz-the-price-on-inequality

 

먼저 미국에서 불평등이 지난 수십년간 점점 더 커져왔다는 사실을 바닥에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몇몇 우파 인사중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좌우파를 막론하고 진지한 분석가들이라면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기 이에 대한 증거들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 간의 격차는 년소득 기준으로 이미 거대하지만 총 자산 기준으로 보면 그 격차는 더욱 더 커진다는 점만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월마트의 창립자 가문인 월튼 가문을 보면, 월튼가 6명의 상속이들이 소유한 자산의 합이 약 90억 달라인데 이는 미국 전체 하위 30퍼센트 인구의 자산을 모두 합한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산이 0이거나 빛을 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택 버블 붕괴 이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워렌버핏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20년 계급 전쟁이 있었고 내가 속한 계급이 이겼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논란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있습니다. 우파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불평등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며 부자들이 부유해지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부유해 진다고 말입니다. 이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 지는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단지 하류층 뿐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해서) 현재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데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남성 노동자가 오늘날 받는 임금은 75년전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편 좌파 사람들은 늘어나는 불평등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적게 가졌는데 저렇게 적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이 가져야 하냐며 단순한 정의의 문제로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의도 사고 파는 시대에 이런 주장은 감상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감상은 집어치우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더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자들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동작하는 사회가 있어야만 그들의 지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불공평한 사회에서는 사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경제 또한 안정적이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나 근대 사회의 예를 보더라도 불평등이 어느 임계 지점에 이르면 경제가 붕괴되고 사회의 전체 기능이 마비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부자들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고요. 왜 그런지 좀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Consumption Problem

하나의 이익집단이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익집단에게 단기적인 이득이 되는 정책을 채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회 전체의 장기적으로 해가 되는 것이라도 말이지요. 미국의 세제, 규제정책, 사회 자본 투자가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소득과 부가 한쪽 방향으로 집중되는 것의 결과는 미국 경제의 한 축인 가계 소비의 문제로 쉽게 드러납니다.

 

미국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을 때,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세제 개선의 효과로 불평등이 줄어들었을 때경제가 가장 왕성히 그리고 빠르게 성장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공황과 같이 경제가 위축이 되었을 때는 그 이전에 불평등이 심화되었었다는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돈이 상위 계층에 편중되어 있을 때 일반 가정의 소비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이 없을 경우, 필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돈을 저소득 계층에서 상위 계층으로 옮기면 소비는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수입의 일부만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말판 월스트리트 저널의 뒷면에 있는 매물로 나온 집들의 사진을 한번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듯이, 부자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소비를 해대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계산을 해보면 이 현상이 쉽게 납득이 가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화당 대선 후보인 밋 롬니의 2010년 소득은 2170만 달라입니다. 만약에 롬니가 아주 화려한 삶을 살기로 작정했
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해에는 그 수입의 일부만을 지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만일 그 돈을 500명에게 각각 년 43,400달라 연봉의 일자리를 주어 나주어준다면  그 돈 거의 모두가 지출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이 상위 계층에 집중될 수록 전체적인 수요는 감소한다는 것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외부적인 요인이 없이는 수요는 공급보다 적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 고용의 감소를 야기하고 고용의 감소는 더욱 수요를 위축시키게 됩니다.  1990년대에는 이러한 악순환을 막은다른 무엇이 기술주 거품이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주택 거품이었습니다. 경기가 침체된 오늘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정부지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정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방법입니다

 

The “Rent Seeking” Problem

여기서 경제학 용어 하나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대라는 단어는 원래 땅에 대한 사용 대가로 땅 주인이 받는 돈을 뜻합니다. 이것은 소유로 인해 얻어지는 소득으로 생산에 기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임금은 노동자가 일을 한 대가로 받는 돈입니다. 지대의 의미는 현대에 와서는 모든 독점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다른 종류의 소유권과 관련된 이득을 뜻하는 것으로도 확대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회사가 정부에 설탕과 같은 특정 재화를 수입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얻었다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적인 소득을쿼타 지대라고 부릅니다.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는 것은 이와같은 일종의 지대를 유발시킵니다. 같은 관점에서 특정 이익집단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것도 이러한 지대의 일종입니다. 광의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의 정치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부자들을 돕는 정치행위들을 일종의지대를 추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부의 특혜, 시장의 경쟁을 줄이는 법규들, CEO가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용하는 법규들, 환경을 해치는 행위를 하면서 이익을 얻는 회사들을 허용하는 법규들 말입니다

 

지대를 추구하는 행위가 우리 경제에서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계량하기는 어렵지만 명백한 것은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점입니다. 경제에 생산적인 도움을 주는 도구가 아닌 시장예측에 기반해 움직이는 금융산업이 지대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분야입니다. 이들이 거두어 들이는 지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또 금융계는 대표적인 지불 수단인 크레딧 카드와 직불카드 수수료나  기타 잘 알려지지 않는 많은 종류의 수수료를 통해 많은 지대를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지대는 판매점 그리고 결국에는 소비자에게 전가됩니다. 약탈적인 대출 행태를 통해 중산층과 저소득층으로부터 빨아들이는 이자도 지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금융 산업의 이익은 전체 산업계 이익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융산업의 사회적 기여가 그만큼 높거나 아니 그 비슷하기라도 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난 금융 위기는 금융 산업이 우리 경제를 어떻게 붕괴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경제와 같이 지대 추구에 몰두하는 경제에서는 사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잘 맞지를 않습니다. 단순히 말해 지대는 사회 일부 계층의 부를 지대를 받는 사람에게로 재 분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 불평등의 많은 부분이 지대 추구의 결과입니다, 왜냐면 많은 경우에 있어 지대는 하위층의 돈을 상위층으로 재분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경제적 영향이 있습니다. 지대를 얻기 위한 싸움은 제로섬 게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대를 추구하는 행위는 생산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드는 노력은 모두 파이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려는데 들어가지, 파이의 크기를 키우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자원 할당을 왜곡하고 경제를 취약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지대를 추구함으로서 얻는 보상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회의 에너지가 지대를 얻기 위해 투입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 말이지요.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지대를 추구하는 행위가 만연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자원에 대한 권리를 얻는 것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 보다 훨씬 쉽게 부유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원부국들이 역설적으로 경제가 그토록 취약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나이지리아나 콩고가 아니라고 웃어 넘기기는 쉽지만, 지대를 추구하는 것의 본질은 같습니다.

 

The Fairness Problem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기 위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만약 불공정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면 열심히 일하고 싶은 동기 유발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효율임금 이론이라고 부르는, 임금등을 포함해 회사가 근로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가 근로자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노동 경제학의 핵심 원칙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이론은 거의 한세기 전에 위대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에 의해 다뤄진 것으로 그의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고임금을 받는 사람은 일
적으로 효율적이다
”. 사실 이 명제를 단순히 이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많은 경제학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입니다.

 

공평에 정확한 의미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제각각일 테지만, 현재 미국의 점증하는 소득 불균형과 그리고 부가 재 분배되는 과정 전반이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나 바이오테크의 선구자들 같이 우리 경제를 바꾼 사람들이 부를 축척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 경제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경제의 최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각종 지대를 얻어내는데 뛰어난 사람들이며 이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불공정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존 코자인이 이끄는 금융기업인 MF 글로벌이 수천명의 피해자를 남긴 채 파산했을 때 놀라워 했습니다하지만 월스트리트의 최근 행태를 기억한다면, 사람들이 MF 글로벌의 CEO들이 파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너스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워 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CEO가 임금을 줄이고 근로자들을 해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보상은 증가시킬 때 근로자들은 당연하게도 불평등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근로자들이 일에 들이는 노력, 회사에 대한 충성심, 회사의 미래에 자신의 미래를 걸려고 하는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구 소련의 노동자들에게 만연했던 정서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관리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소련의 경제를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붕괴를 가져온게 된 주요한 요인입니다. 구 소련의 농담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임금을 주는 척 하고, 우리는 일을 하는 척 한다.”

 

불평등이 확대되는 사회에 있어 공정성의 문제는 단순히 임금이나 수입, 부와 같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광범위한 인식의 문제입니다. 과연 이 사회가 나아고자 하는 방향에 있어 내 몪이 존재하는가? 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동의 행동을 취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만약 이에 대한 답이 명백히아니오라면 동기가 감소하고 그로 인한 영향은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공정성의 주요한 측면 중 하나는 기회의 균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메리칸 드림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말입니다. 호라시오 애글러의(19세기 작가로 가난한 사람이 성공한 이야기를 많이 씀) 이야기들은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 있지만,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의 현실은 그와는 매우 다릅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최 하류층에서 최상층으로 (심지어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구 유럽이나 다른 모든 선진국들보다 낮습니다. 반면 최상층에 있는 사람은 하류 계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다른 어느나라에 있는 것 보다 더 낮다는 사실에 마음 편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he Mistrust Problem

근대 정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왜 사람들이 투표를 하는가입니다. 개인의 한표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투표를 하러 가는 데에는 돈과 시간이 드는데 반해, 어떤 주도 투표하지 않는다고 벌금을 부과하지는 않습니다. 근대 정치 경제학 이론은 이성적인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아를 가정하는데, 그런 가정 아래에서는 왜 사람이 투표를 하러 가는지 (자기 이익에 반하면서) 미스터리입니다.

 

해답은 우리가 사회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으로 투표는 우리의 의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는 깨지기 쉽습니다. 만약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믿음이 깨지면,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적 의무에 더이상 구속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계약이 깨지고 정부와 시민간의 믿음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환상에서 깨어나고 무관심해지며 더 심한 현상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세계의 많은 민주 국가에서 이러한 불신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불신은 어쩌면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골드만 삭스의 사장인 로이드 블랭크페인이 아주 분명하게현명한 투자자는 믿음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라고 이야기 했었듯이 말입니다.
드만 삭스에서 투자 상품을 샀던 사람들은 더 잘 알았어야 합니다
. 골드만 삭스가 그들의 고객인 투자자들을 기만할 도구와 동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투자은행들에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기만적인 신용카드 사업과 약탈적인 대출 관행은 미국 국민 대다수에게 은행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우리 경제에서 신뢰가 차지하는 비중을 과소 평가 하곤 합니다. 만약 모든 계약이 법원에 의해 강제되어야 한다면, 우리 경제는 꽉 막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역사를 통털어 경제가 번영했던 때는 한번의 악수가 곧 계약과 동일한 의미였던 때였습니다. 신뢰가 없이는 구체적인 사항은 차차 해결해 나가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업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신뢰가 없이는 각각의 시장 참여자들이 주위를 살피며 언제 어떻게 상대가 나를 배신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점증하는 불평등은 신뢰를 갉아먹습니다. 그리고 그 경제적인 파급 효과는 구 소련에서 익히 보았던 현상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불신은 승자조차도 경계해야 하는 그런 경제 환경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패배자들은 모든 경제 활동에 있어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치와 공공부분만큼 신뢰가 중요한 분야도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이 비슷한 상황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을 더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커가는 불평등은 우리가 발을 올려놓은 곳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한쪽은 수많은 사람들이 노를 젓는 거대한 요트에 타고 있고, 다른 한쪽은 부서진 배의 잔해를 잡고 물에 간신히 떠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왜 사람들이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엄청나게 다른 견해를 가지는 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커가는 불평등은 치안, 도로와 전기 가스등의 유틸리티,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 공립학교에 대한 접근성 등등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장래뿐 아니라 미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점점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이때에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대학교의 예산을 삭감하고 등록금을 인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리한 조건의 학자금 대출을 줄이고 있습니다. 대신 이익이 되는 다시말해 지대를 추구하는 것의 한가지 방법으로서 사학에서의 대출을 옹호합니다. 이러한 대출은 표준화되어 있지 않고 대출자가 파산을 하더라도 면책받을 수 없습니다. 하위층으로부터 돈을 뜯어갈 수 있도록 고안된 상류층이 만든 또하나의 도구 입니다.

 

The “Be Selfish” Solution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제한된 이해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불평등이 가져오는 해악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데 드는 비용은 과대평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이념적인 선동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 지고 있으며 이것은 정치 경제 정책에 있어 재앙적인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1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좋은 교육과 주변의 좋은 참보들과 그 좋은 비지니스 감각을 가지고도 이처럼 불평등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수세대 전의 1%도 이보다는 훨씬 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전 세대의 1%는 견고한 바탕이 없이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헨리포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회사를 위한 좋은 선택이 자신의 근로자들에게 좋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왜냐면 그는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길 원했고 그들의 자기 회사의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부유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세금과 사회 복지 프로그램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것 뿐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규제를 통해 제약을 가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루즈벨트와 경제학자 케인즈는 자본주의자들에게서 공격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자들 품에서 자본주의를 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의심많고 사람을 조정하려는 것으로 유명한 리차드 닉슨은 사회 평화와 경제적 안정은 메디케어(정부 의료보험), 헤드 스타트(저소득층을 위한 교육,의료 관련 복지 제도), 소셜 시큐러티(저소득층 생계 보조 제도) 등과 같은 사회 복지 제도에 투자하는 것으로 지켜질 수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닉슨은 심지어 최소 소득 보장과 같은 상당히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래서 내가 오늘날의 상위 1% 계층에 드리는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만약에 세금을 올린다거나 교육에, 공공 근로, 의료 보장제, 과학등에 투자해 불평등을 줄인다는 정책안에 대해 의견을 내어달라고 초청을 받았을 때, 자선 따위는 제처두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십시오. 그러한 정책안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찬성하실 생각일랑 하덜 마시고,
저 스스로를 위해 찬성하시기 바랍니다
.

 

 

글은 엄청나게 길지만 사실 내용은 간단하게 한줄로 요약할 수 있다. “불평등이 커지면 사회가 붕괴하니 부자들은 그걸 막기 위해 불평등 해소에 신경써야 한다 (안그러면 모두 망한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명제도 훌륭한 경제학자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멋진 글이 탄생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유럽의 복지국가를 가리켜 사회주의 국가라고 매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평등하고는 거리가 먼 사회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보장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언급된 자료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빈곤층에 있는 사람이 그 위 중산층으로 올라가는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가능성이 선진국 중 가장 낮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한번쯤 새겨 들어 봄직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Sensationalism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과장하거나, 잘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거나, 심지어 사실을 왜곡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난 척 하고 싶거나, 혹은 남의 주목을 받고 싶어 그러는 것인데, 이것이 조금 지나치면 거짓말 장이 내지는 사기꾼이 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 한두번은 귀가 솔깃해 귀를 기울일지 모르지만 실체를 파악하고 나면 더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부풀리기의 유혹은 강렬해서 황우석 박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학계에서조차 주변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혹은 논문 실적을 올리기 위한 과장과 조작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 중에 대표격은 기자들이다. 기자들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위해 사실을 부풀리거나 독자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고 싶은 유혹이 강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기자의 신뢰도, 더 나아가 언론의 신뢰도는 얼마나 이러한 유혹을 잘 참고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제공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어제 동아일보에 실린 정성희 논설위원의 “즐기는 수학” 이라는 글은[1] 실망스럽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독일에 거주하는 16살의 인도계 학생이 지난 3세기 동안 수학자들이 풀지 못한 뉴턴의 난제를 풀었다. 학생은 어려서부터 수학을 매우 즐겼으며 인도는 원래 수학이 강한 민족이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학을 즐기지 못하고 학교을 졸업하면 수학과 담을 쌓는다. 입시 수학에서 벗어나 인도 학생처럼 수학을 즐기는 문화로 바뀌어야 인도처럼 수학 강국이 될 수 있다.”

글의 취지는 공감한다. 나 스스로 수학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만 수학을 좋아하지 못해 아쉬운 터라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즐겁게 수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 주장에 근거로 사용한 인도 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확인 없이 저자의 입맛에 맞게 가져다 쓴 흔적이 분명해 보여 글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정성희 논설위원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면 “16세 인도계 독일 소년인 쇼리야 라이 군이 수학계 350년의 난제인 ‘뉴턴 퍼즐’을 학교 과제주간의 행사로 간단하게 풀어냈다. 뉴턴 퍼즐은 공중에 던져진 볼의 궤도를 계산해 볼이 벽에 어떻게 부딪쳐 튕겨 나올지를 예측하는 양자역학 문제로 아이작 뉴턴이 출제했다. 지금까지는 최고 물리학자들이 컴퓨터에 의존해서만 계산할 수 있었다.” 이라고 적고 있다.

당장 말이 안되는 것은 “양자역학 문제라는 구절이다. 뉴턴 시대에는 양자역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계 350년의 난제라거나, 최고 물리학자들이 컴퓨터에 의존해서만 계산할 수 있었다는 말 또한 문제다. 이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물리학자들에게 물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은가?

같은 이야기를 다룬 MSNBC 의 기사[2]는 이런 확인 작업을 거쳤다. 이름있는 학교 물리학 교수들에게 이메일로 이 학생이 풀었다는 문제가 무엇인지, 학생이 작업이 의미있는 것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이들의 답변은 기본적으로 논문이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할 수 없지만,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연구는 고전적인 연구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뉴턴의 난제를 풀었다는 주장에 대해 굉장히 의심스럽다고 이야기 한다. 똑같은 기사거리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기자의 노력이 고스란히 보여 훨씬 믿음이 갈 수 밖에 없다.

언론사들이 좀더 사실에 기초한 성의있는 글을 만들지 않는 한 언론의 권위는 점점 설 땅을 잃어갈 것이다.

[1] 동아일보, “즐기는 수학”,
http://news.donga.com/Column/3/04/20120531/46641057/1
[2] MSNBC, “16-year-old’s equations set off buzz over 325-year-old physics puzzler”,
http://cosmiclog.msnbc.msn.com/_news/2012/05/28/11920006-16-year-olds-equations-set-off-buzz-over-325-year-old-physics-puzzler?chromedomain=worldnews